분노의 주먹 (Raging Bull, 1980)
분노의 주먹 (Raging Bull, 1980)
아웃 오브 아프리카 (Out of Africa, 1985)
한 권투 선수가 경기 직전 링 위에서 몸을 풀고 있다.
링 밖의 관중석에는 수많은 관중들이 있는 듯하지만 자욱하게 낀 안개로 보이지 않고, 드문드문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것만 보인다.
권투 선수는 마치 경기장에 혼자 있는 듯 쓸쓸해 보인다.
권투 선수는 수많은 관중들과 기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듯하지만 이 모든 것이 마치 헛된 꿈처럼 느껴진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Cavalleria Rusticana)’의 간주곡이 배경 음악으로 흐르는 ‘분노의 주먹’의 오프닝 장면은 앞으로 전개될 영화의 이야기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어지는 장면들은 이를 좀더 명확하게 해준다.
한때 권투 선수였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비대해진 제이크 라 모타(Jake La Motta, Robert De Niro)가 이번에는
나이트클럽의 스탠딩 개그맨으로 무대에 서기 직전에 대사 연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장면은 다시 23년 전의 19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링 위의 제이크 라 모타를 보여준다.
‘분노의 주먹’은 유명한 권투 선수에서 쓸쓸한 나이트클럽의 스탠딩 개그맨으로 전락한 제이크 라 모타의 인생을 다룬 영화이다.
‘분노의 주먹’은 권투 영화가 아니다. 영화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이 권투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물론 라 모타와, 그의 동생이자 매니저인 조이(Joe Pesci)가 라 모타의 체중에 관한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분노의 주먹’을 권투 영화로 만들 만큼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권투 경기 또한 승패에는 관심이 없다. ‘분노의 주먹’에서의 권투 경기는 라 모타의 괄기
성적 질투, 분노, 좌절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의처증이 심해져가는 라 모타는 아내 비키(Cathy Moriarty)가 무심코 잘 생겼다고 한 상대 선수(Tony Janiro, Kevin Mahon)의
얼굴을 링 위에서 무참하게 뭉개버린다.
상대 선수가 다운되어 일어나지 못하자 라 모타는 두 손을 번쩍 들고 링을 돌면서 관중석에 있는 비키를 쳐다본다.
다른 남자에게 한눈팔지 말라는 비키에 대한 무언의 경고인 것이다.
‘분노의 주먹’은 실제 권투 선수였던 라 모타의 자서전 ‘Raging Bull: My Story’이 원작인 영화이긴 하지만, 전기 영화도 아니다.
‘분노의 주먹’은 라 모타의 인생을 통해 한 남자의 몰락을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분노의 주먹’을 이야기할 때마다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록키 (Rocky, 1976)’가 자주 언급되곤 하는데
권투를 소재로 한 이 두 영화의 이야기가 서로 완벽한 대척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록키’가 영화 속 가상의 인물인 록키 발보아(Sylvester Stallone)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의 성공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분노의 주먹’은 실제 인물인 라 모타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의 실패를 이야기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 두 영화의 제작자가 로버트 챠토프와 어윈 윙클러로 같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분노의 주먹’이 라 모타의 몰락을 다룬 영화인 만큼 영화의 이야기에서 이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라 모타의 인생에서 행복했던 순간들은 영화의 이야기 전개에서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
라 모타가 비키와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꾸리는 라 모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담은 장면들은 교차 편집으로 함께
보여주는 라 모타가 승승장구하는 권투 경기 장면들과 시간적으로 비슷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던 순간들을 담은
장면들을 가정용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듯한 컬러 화면으로 처리하여 마치 영화의 초반부에서 잠깐 나왔던
나이트클럽의 스탠딩 개그맨으로 전락한 라 모타가 비디오를 보면서 자신의 행복했었던 순간들을 회상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