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브하트 (Braveheart, 1995)
브레이브하트 (Braveheart, 1995)
영화배우로 유명한 멜 깁슨이 제작과 감독, 주연까지 겸한 ‘브레이브하트’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위해
잉글랜드의 왕, “롱솅크스(Longshanks)” 에드워드 1세(Edward I)에 맞서 싸운 스코틀랜드의 영웅, 윌리엄 월레스(William Wallace)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멜 깁슨 감독은 ‘브레이브하트’에서 언급할 만한 영화 예술적인 영상미나 의미 심장한 화면의 구성은 보여 주지 못하고 있지만,
직설적이고 거친 화면들의 대담한 전개를 통해서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이야기의 전개만큼은 탁월한 연출력을 보여 주고 있다.
멜 깁슨 감독은 자신의 이러한 연출력을 이용하여 윌리엄 월레스의 사랑과 용기, 집념을 녹색의 광활한 자연을 바탕으로 감동적으로 그려나가고 있다.
하지만 과도하게 잔인한 장면과, 특히 영화의 극적인 구성을 위해 역사를 너무나도 심하게 왜곡시킨 점은 눈에 거슬린다.
스코틀랜드의 왕, 알렉산더 3세(Alexander III)가 후계자 없이 죽자, 잉글랜드의 왕, 롱솅크스(Patrick McGoohan)는 스코틀랜드의 왕위마저 탐을 낸다.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롱솅크스와 대립하게 되고, 이 와중에도 왕위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자기네들끼리도 싸우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롱솅크스는 스코틀랜드를 지배하기 위한 일단계로, 잉글랜드 귀족들의 스코틀랜드로의 이주를 장하기 위한 프리마 녹테(primae noctis, 초야권)를 부활시킨다.
‘브레이브 하트’는 롱솅크스를 이교도에다 비열한 폭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스코틀랜드의 관점에서 만든, 그리고 영화의 극적인 구성을 위한 설정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잉글랜드의 유스티니아누스(English Justinian)”라고 불리워질 정도로 유능한 왕이었다.
그리고 프리마 녹테는 영화에서 잉글랜드의 폭정을 부각시키고 스코틀랜드의 민중 봉기가 일어나게 된 하나의 계기를 주기 위해
도입된 영화적 장치일 뿐이지, 실제로 에드워드 왕조가 프리마 녹테를 사용한 적은 없다.
윌리엄 월레스(Mel Gibson)가 잉글랜드에 맞서 봉기를 하게 된 원인이 프리마 녹테를 피해 몰래 맞이한 아내,
머론(Catherine McCormack)의 죽음이라는 것도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1297년 5월, 윌리엄 월레스가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 Lanark의 잉글랜드 치안 담당관이었던 William Heselrig를 죽인
사건을 윌리엄 월레스의 봉기의 시발점이라고 보고 있는데, 윌리엄 월레스가 정사(正史)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그 이전의 윌리엄 월레스에 대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영화에서와는 달리 윌리엄 월레스에게 아내가 있었는지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1297년 9월 11일, 윌리엄 월레스는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스털링(Stirling)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대파한다.
실제로 스털링 전투가 벌어진 장소는 영화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평원이 아니라 포스강(River Forth)의 스털링 다리 근처였다.
당시 잉글랜드군의 기병의 숫자가 스코틀랜드군의 기병의 숫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스코틀랜드군은 거의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군이 이길 수 있었던 건 기병대가 한꺼번에 건너가기 힘든 좁은 다리의
지형을 이용한 스코틀랜드군의 뛰어난 전술 때문이었다. 하지만 멜 깁슨 감독은 영화의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을 위해 스털링 전투를 다리 근처가 아닌 평원에서 벌어진 것으로 설정했다.
1298년 7월 22일, 스털링 전투의 패배로 위협을 느낀 롱솅크스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폴커크(Falkirk)에서 윌리엄 월레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과 대적한다. 스코틀랜드군은 지원을 하기로 약속을 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배신으로
잉글랜드군에게 패하게 되고, 윌리엄 월레스는 간신히 목숨만은 건지고 잉글랜드군으로부터 빠져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