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의 사무라이 七人の侍 1954
7인의 사무라이 七人の侍 1954
이러한 이야기 구조의 영화들은 관객들에게 액션뿐만이 아니라 개성이 서로 다른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도 준다.
‘7인의 사무라이’에서도 머리를 빡빡 밀고 중으로 변장한 후 인질이 잡혀 있는 집에 들어가 인질을 구하는
시마다 캄베이를 시작으로, 이후 차례로 등장하는 6명의 사무라이들의 캐릭터를 보는 재미가 있다.
시마다 캄베이는 도적들이 하나씩 제거될 때마다 마을의 지도 옆에 그려 놓은, 도적들을 나타내는 동그라미들을 하나씩 지워 나간다.
‘7인의 사무라이’는 관객들의 흥미를 끄는 이러한 이야기들뿐만이 아니라 영상 기술 또한 획기적인 영화이다.
‘7인의 사무라이’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처음으로 여러 대의 카메라를 사용하여 촬영한 영화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서로 다른 각도와 위치에 설치한 여러 대의 카메라를 사용하여 한 장면을 입체적으로 촬영함으로써 현장감과 박진감이 넘치는 액션 장면들을 연출하였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여러 대의 카메라를 사용하여 장면들을 촬영한 만큼
엄청난 촬영 분량으로 인해 생기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촬영 현장에서 촬영을 마친 후에는 곧바로 편집 작업을 했다.
‘7인의 사무라이’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첫번째 사무라이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사무라이가 일본의 역사에서 정치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었으며,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7의 사무라이’만 보더라도 사무라이들과 마을 주민들 간 서로에게 대하는 행동들이나,
원래는 농민의 아들이었으나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사회적으로 부여된 계급을 극복한 키쿠치요의 이야기로 미루어 볼 때
사무라이와 농민의 계급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7인의 사무라이’ 외에는 구로사와 아카라 감독의 다른
사무라이 영화들을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7인의 사무라이’는 농민들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무라이에 대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연민이 느껴지는 영화이다. ‘7인의 사무라이’의 마지막 장면에서 도적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마을을 떠나려는 시마다 캄베이가 노래를 부르며 모를 심는 마을의 주민들을 바라보며 말한다.
“우린 또 졌어. 이긴 것은 농민들이지 우리가 아냐.”
따라서 ‘7인의 사무라이’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일본의 무사 계급, 사무라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7인의 사무라이’를 서부 영화로 리메이크한 ‘황야의 7인’이 흥행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나 작품성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7인의 사무라이’의 이야기는 일본의 사무라이와 본질적으로 다른 서부의 총잡이와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이야기이다.
반면에, ‘7인의 사무라이’의 이야기들 중 ‘7인의 사무라이’보다는 오히려 ‘황야의 7인’에 더 잘 어울리는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마을을 구하러 온 영웅과 마을 처녀와의 사랑 이야기이다. ‘7인의 사무라이’에서 도적들과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
시노(津島 恵子, Keiko Tsushima)가 오카모토 카츠시로와 함께 있는 것을 본 시노의 아버지 만조(藤原 釜足, Kamatari Fujiwara)가
시노를 심하게 때리자, 이 광경을 본 마을의 주민들이 모여드는 장면이 있다. 시치로지와 마을의 주민인 리키치(土屋 嘉男, Yoshio Tsuchiya)가
시노와 오카모토 카츠시로가 젊어서 그러니 젊은 사람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시노를 용서해 주라고 만조를 설득하는데,
시치로지와 리키치의 주장은 단지 영화를 위한 설정이며, 영화의 배경인 전국 시대 당시의 일본의 계급 사회에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주장이다.
‘황야의 7인’은 치코(Horst Buchholz)가 마을에 남으면서 마을 처녀인 페트라(Rosenda Monteros)와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끝나지만, ‘7인의 사무라이’는 시노와 오카모토 카츠시로의 사랑이 결국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