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고 (Fargo, 1996)
파고 (Fargo, 1996)
‘파고’가 어떤 장르의 영화인가 물으면 대답하기 참 곤란하다. 필름 누아르(film noir)로 구분을 해놓았지만
우리가 봐 왔던 전형적인 필름 누아르와는 많이 다르다.
범죄 스릴러에다가 코미디를 섞어 놓았다. 파고 만화 캐릭터 같은 등장인물들,
영화의 이야기와는 상관이 없어 보이는 장면들과 장난스런 대사들을 보면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도 풍긴다.
형제인 에단 코엔과 조엘 코엔이 각본을 쓰고, 에단 코엔이 제작을, 조엘 코엔이 감독을 맡은
‘파고’는 코엔 형제의 장난기가 다분한 영화이다.
‘파고’는 여러 장르를 섞어 놓았다고 해야 할 지, 새로운 장르를 창조했다고 해야 할 지 애매모호하지만,
어쨌든 코엔 형제의 독특한 영화 형식을 볼 수 있는 영화이다.
‘파고’는 코엔 형제의 독특한 영화 형식을 통해 관객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들기도 하고,
충격에 빠뜨리기도 하고, 씁쓸하게 만들기도 하고, 관객들에게 희망을 주기도 한다.
코엔 형제의 장난기는 영화가 시작하자 마자 발동한다. ‘파고’의 이야기는 허구다.
하지만 ‘파고’는 관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것은 실화다.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사건은 1987년 미네소타에서 일어난 사건이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 “이 영화에서의 등장인물들과 사건들은 허구다.”라는 자막이 올라간다.
빚에 쪼들린 자동차 세일즈맨 제리 룬드가드(William H. Macy)는 자동차 수리공 셰프 프라우드푸트(Steve Reevis)를 통해
소개 받은 잡범 칼 쇼월터(Steve Buscemi)와 개어 그림스러드(Peter Stormare)에게 아내 진 룬드가드(Kristin Rudrud)을 납치하게 하여
돈 많은 장인 웨이드 구스터프슨(Harve Presnell)으로부터 몸값을 받아 내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칼과 개어는 진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경찰관(James Gaulke)을 살해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우연히 현장을 지나가던 사람들마저 살해하고 만다.
필름 누아르는 세상은 본질적으로 타락한 곳이고, 타락한 인간들로 가득하다는 사상이 영화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전형적인 흑백 필름 누아르를 보면 냉혹하고 비열한 거리,
어두컴컴한 그림자를 특징으로 하는 영화의 이야기의 무대는 바로 타락한 세상이고,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탐욕으로 타락한 인간들이다.
영화의 제목이 노스 다코타주에서 가장 큰 도시인 ‘파고’이기는 하지만, 영화의 첫 장면에서 제리가 칼과 개어를 만나는 곳으로 잠깐 나올 뿐,
‘파고’의 이야기의 주무대는 미네소타주의 브레이너드(Brainerd)와 미네아폴리스(Minneapolis)이다.
파고는 ‘파고’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자 영화에서의 모든 타락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리고 제리와,
칼, 개어는 돈 때문에 사람을 납치하고 살인까지 저지르는 타락한 인간들이다.
영화가 시작한 지 30분이 지난 뒤에야 등장하는 영화의 주인공인 브레이너드의 경찰서장 마지 건더슨(Frances McDormand)은 ‘파고’의 독특한
영화 형식만큼이나 독특한 캐릭터이다. 출산을 곧 앞둔 임신부인 마지는 진짜 모자라 보이는 동료 경찰관
루(Bruce Bohne)와는 달리 아주 영리한 경찰관이지만, “물론이죠”, “그럼요”라는 의미의,
보통의 “예(Yeah)” 대신에, 사투리인지 영화를 위해 만든 어투인지 알 수 없는 “야(Yah)”를 연발하면서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는,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루만큼이나 엉뚱하고 코믹한 캐릭터이다. 조엘 코엔의 아내이기도 한 프란시스
맥도먼드는 마지 건더슨 역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파고’를 보면 영화의 이야기와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장면들과 장난스런 대사들이 많이 나온다.
한 예로 마지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보라. 새벽에 전화를 받고 나가려던 마지는 남편 놈 건더슨(John Carroll Lynch)이 굳이 차려 준 아침 식사를 먹는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간 마지가 차 시동이 걸리지 않자 다시 집안으로 들어와 놈에게 점프 스타트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장면을 굳이 보여 준다.
이러한 장면들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장면은 사건 수사를 위해 미네아폴리스에 온 마지가 동창인 마이크
야나기타(Steve Park)를 만나는 장면인데, 영화의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꽤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주로 마지와 놈을 중심으로 보여 주는, 영화의 이야기와는 상관이 없는 일상적인 장면들은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면서,
칼과 개어를 중심으로 보여 주는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범죄 장면들과 대조를 이룬다.
사실 ‘파고’는 영화의 이야기보다는 코엔 형제의 독특한 영화 형식을 통해 관객들에게 영화의 주제를 전달하는 영화이다.
엉뚱하고 코믹한 캐릭터들, 영화의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장면들과 장난스런 대사들은 바로 타락한 세상을 조롱하고 풍자하기 위한 영화적 설정이다.
특히 자신의 절망을 감추기 위해 마지에게 거짓말을 하고 쪼다 같이 행동하는 마이크는 자신의
범죄 행각을 감추기 위해 마지에게 거짓말을 한, ‘파고’에서의 모든 타락의 진원인 제리를 조롱하기 위한 캐릭터이다.
마이크의 거짓말은 마지로 하여금 제리도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한다.
마이크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 마지는 제리를 다시 찾아가 추궁한다.
‘파고’가 보여 주는 범죄 장면들은 상당히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이다.
개어가 칼의 토막 난 시체를 분쇄기에 밀어 넣는 장면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제리의 아내 진을 납치해 아지트로 데리고 온 칼이 겁에 질려 날뛰는 진을 보며 웃는 장면도 상당히 비인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