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감독의 음식남녀; 대만 출신의 세계적인 거장인 리안 감독의 초기작. 노년의 수석 요리사 주사부와 장성한 세딸의 이야기를 통해 결혼과 가족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세대간의 긴장을 다루었다.
경쾌하고 속도감 있는 서사 전개에 중국 전통 요리사 주사부가 펼치는 요리의 향연이 화려한 볼거리를 이룬다.
〈쿵후 선생〉(1992), 〈결혼 피로연〉(1993)과 함께 ‘대만 아버지 3부작’을 이루는 작품으로 흥행과 비평에서 성공을 거두며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 2007 코엔 형제 감독, 코맥 매카시의 동명 소설 원작 ]
은퇴한 수석 요리사 주사부는 세딸과 함께하는 일요만찬을 위해 성대한 상을 차려낸다.
그는 장성한 딸들과 함께 살면서 요리뿐 아니라 빨래와 청소까지 도맡아 해결하는 성실한 아버지지만 언젠가 결혼으로 집을 떠날 딸들에게 부양의 의무를 상기시키는 존재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가 힘들여 차려낸 진수성찬은 더이상 딸들에게 환호받지 못한다.주사부는 차츰 미각을 잃어가고 있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이안 감독의 음식남녀 작품에 대한 해설
- 이방인 감독, 리안
1954년 대만에서 태어난 리안은 미국에서 영화 공부를 마친 뒤 그곳에 정착한 이방인 감독이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 본토에서 태어나 대만으로 이주한 외성인이었다.
그 탓에 그의 정체성은 복잡해졌다.
중국의 지주였던 아버지는 혁명으로 가족의 몰살을 목격하고 혼자 살아남아 대만으로 건너온 인물로 중국 현대사의 역사적 굴곡을 몸으로 체험한 세대였다.
전형적인 유교적 가부장이었던 아버지는 고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아들도 교사나 교수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학업 성적이 시원찮았던 리안은 대학입시에 두번이나 낙방하여 아버지에게 큰 실망을 안겼다.
리안은 1975년에 타이완예술학교를 졸업한 뒤 1979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리노이대학 졸업작품으로 뉴욕대학에서 상을 받기도 했지만 영어가 능숙하지 않은 아시아 출신 감독에게 연출의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리안은 그로부터 6년 동안 직업 없이 지냈다.
이 시기 리안은 생계를 책임지는 아내 대신 가사 일을 전담하면서 몇편의 시나리오를 쓰며 연출의 기회를 기다렸다.
리안의 본격적인 연출 경력은 대만의 국립영화사인 중앙전영공사가 주최한 시나리오 공모전에 응모하여 1등상을 받으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1992년, 37살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찍은 첫 영화 〈쿵후 선생〉은 그렇게 해서 나왔다.
리안은 대만전영공사의 지속적인 후원으로 1993년 〈결혼 피로연〉에 이어 다음해 〈음식남녀〉까지 찍을 수 있었다.
영화사적 의미
앞의 두 영화가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음식남녀〉는 대만을 무대로 한 그의 유일한 작품이다.
또한 이 영화들을 찍으면서 리안은 그의 평생 영화 동지인 제임스 샤무스를 만났다.
뉴욕에서 인디영화 제작사를 설립한 제임스 샤무스는 유망한 신인감독으로 리안을 발굴했고 이후 그의 프로듀서이자 시나리오작가로 오랫동안 함께했다.
리안은 이 세편의 가족 드라마에 아버지를 주인공 역할로 세웠다.
물론 이 영화들을 리안의 자전적인 영화는 아니다.
가혹한 역사적 격랑을 체험한 그의 아버지는 안정된 삶을 무엇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보수적인 가부장이었다.
심지어 그는 리안이 아카데미상을 탔을 때에도 영화감독보다는 교사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음식남녀〉의 아버지만 해도 그렇게 완고한 편은 아니지만, 리안과 아버지간의 갈등은 유교적 가치관이 지배적인 아시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세대 차의 전형을 이룬다.
영화사적으로 이 영화들은 대만 뉴웨이브의 2세대 작품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1980년대 중반 허우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을 중심으로 한
대만 뉴웨이브의 첫 번째 세대가 등장한 이후,
1990년대에 리안의 이 영화들은 당시 차이밍량과 함께 대만 뉴웨이브의 두 번째 세대로 지칭되었다.
하지만 리안의 영화는 뚜렷한 스타일적 실험을 통해 새로운 아시아 미학을 시도한
대만 뉴웨이브의 1세대 감독이나 2세대 감독들과 상당히 동떨어진, 좀더 대중 친화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후 리안은 미국 영화산업 안에 안착하여 어느 하나의 국적으로 분류불가능한 다양한 작품들을 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