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의

에밀 졸라의 생애 (The Life of Emile Zola, 1937)

에밀 졸라의 생애 (The Life of Emile Zola, 1937)

에밀 졸라의 생애 (The Life of Emile Zola, 1937)

토이 스토리 (Toy Story, 1995)

‘에밀 졸라의 생애’는 영화의 제목이 그대로 말해주듯, ‘나나 (Nana)’, ‘목로주점 (L’Assommoir)’, ‘대지 (La Terre)’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자연주의 작가

에밀 졸라의 생애를 그린 전기 영화이다. 프랑스의 생화학자, 루이 파스퇴르의 이야기를 다룬 전기 영화, ‘과학자의 길 (The Story of Louis Pasteur, 1936)’이

큰 성공을 거두자, ‘과학자의 길’의 제작을 맡은 헨리 블래크와, 연출을 맡은 윌리엄 디털리 감독

그리고 루이 파스퇴르(Paul Muni)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폴 머니가 다시 모여 만든 영화가 ‘에밀 졸라의 생애’이다.

‘에밀 졸라의 생애’는 파리의 어느 허름한 고미다락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에밀 졸라(Paul Muni)와 친구인 폴 세잔

(Paul Cezanne, Vladimir Sokoloff)이 각각 작가와 화가로 성공하는 꿈을 꾸며 서로를 격려해주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에밀 졸라의 생애’의 초반 30분은 에밀 졸라가 지독한 가난과, 프랑스를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프랑스 검찰과 검열에 맞서 싸우면서

창녀의 이야기를 다룬 ‘나나’와 이어지는 작품들의 성공으로 부와 명성를 얻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초반 30분을 제외한 나머지 90분은 프랑스의 양심으로 에밀 졸라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드레퓌스 사건을 다루고 있다.

드레퓌스 사건은 12년 동안 프랑스 사회를 양분하고 들끓게 한 유명한 정치적 스캔들이다.

1894년, 프랑스의 에스테라지 소령(Ferdinand Walsin Esterhazy, Robert Barrat)이 독일 대사관의 폰 슈워츠코펜 대령(Maximilian von Schwarzkoppen)에게

건네려 한 프랑스의 군사 기밀이 적힌 편지가 프랑스의 참모 본부에 입수된다.

참모 본부는 이 익명의 편지의 필적이 드레퓌스 대위(Alfred Dreyfus, Joseph Schildkraut)의 것과 비슷하다는 이유를 들어 엉뚱하게 그를 편지를 쓴 범인으로 지목한다.

반유대주의가 팽배해 있던 당시, 프랑스의 여론은 유대인인 드레퓌스 대위를 역적으로 몰아갔고

결국 드레퓌스 대위는 군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고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의 섬(Devil’s Island)으로 유배된다.

그로부터 2년 뒤, 새로 정보부장에 임명된 피카르 중령(Georges Picquart, Henry O’Neill)은 편지의 필적이 드레퓌스 대위의 것이 아니라

에스테라지 소령의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이를 참모 본부에 보고를 하지만, 참모 본부는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피카르 중령을 정보부장에서 해임하고

북아프리카로 전출시킨다. 진실을 밝히려는 피카르 중령에 의해 이러한 사실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결국 에스테라지 소령은 고발되지만, 에스테라지 소령은 무죄를 선고 받고 풀려나고

피카르 중령은 오히려 군사 기밀을 유출했다고 체포된다.

1898년 1월 13일, 에밀 졸라는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 ‘나는 고발한다 (J’Accuse)’를 “로로르(L’Aurore, 여명)” 신문에 기고하고

참모 본부의 만행을 고발한다. 이로 인해 에밀 졸라는 명예 훼손죄로 고발되고, 1년의 징역형과 벌금 3,000프랑의 선고를 받게 된다. 에밀 졸라는 영국으로 망명한다.

1898년 8월 31일, 에스테라지 소령과 짜고 온갖 문서들을 위조하여 드레퓌스 사건을 덮으려 한 앙리 소령

(Hubert-Joseph Henry, Robert Warwick)이 자백을 하고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에스테라지 소령은 영국으로 도주한다.

에밀 졸라는 프랑스로 돌아오고, 드레퓌스 대위는 재심을 받기 위해서 5년만에 악마의 섬에서 풀려난다.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 대위가 복권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난로 가스 중독으로 1902년 9월 29일에 사망한다. 드레퓌스 대위는 1906년 7월 12일에 무죄를 선고 받고 복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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